중국 문자 발전사
중화민족의 일맥상통하는 한자
세계 문자를 배경으로 하고 한자를 중심으로 하며 소수민족 문자를 중요한 구성요소로 한다. 역대 중국 문자의 정수를 모아 중국 문자의 구조적 특징과 발전 과정을 설명한다.

전시 위치: 중국문자박물관 선문관(宣文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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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전시장
자법자연(字法自然)
한자의 기원에 대해 중국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고대 신화 전설인 창힐조자설(倉頡造字說)이고, 다른 하나는 문자 기원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다. 창힐은 새와 짐승의 발자국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보고 영감을 받아 많은 상형문자를 만들어 인간 세상에 전하였다. 사실 창힐이 문자를 만든 것은 신화 전설일 뿐이며, 그의 존재 여부는 학계에서 아직 논쟁 중이다.
갑골기사(甲骨紀事)
허난성 우양현(舞陽縣) 자후(賈湖) 유적지에서 출토된 한 조각의 귀복갑(龜腹甲)은 8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귀복갑 위에는 현대의 숫자 "8"처럼 보이는 새긴 부호(符號)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페이리강문화(裴李崗文化) 초기의 새긴 부호(符號)에 속한다. 이것은 현재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새긴 부호(符號) 중 하나로, 일부 학자들은 이것이 한자의 기원과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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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전시장
종정천추(鍾鼎千秋)
작책형정(作冊兄鼎)은 허난성 안양 은허에서 출토된 것으로, 높이는 22.1cm, 구경(口徑)은 15.7cm, 복경(腹徑)은 16cm이다. 명문(銘文)은 "작책형(作冊兄)"이라는 세 글자이다. 당시 "작책(作冊)"은 대부분 사관(史官)이었다. 두 번째 글자인 "책(册)"은 끈으로 묶은 죽간(竹簡)과 비슷한 모양으로, 책을 편찬하는 것을 가리킨다. 마지막 글자인 "형(兄)"은 사관의 이름이다. 이 동기(銅器)의 조형은 매우 독특하여 전체적으로 세 개의 코끼리 머리가 연결된 것처럼 보이며, 정족(鼎足)은 코끼리 코와 같다. 위아래는 연주문(連珠紋)으로 장식되어 있고, 복부(腹部)에는 세 짝의 수면문(獸面紋)이 새겨져 있다.
물이재문(物以載文)
호(壺)는 대부분 술이나 물을 담는 용기로, 상나라(商)부터 한나라(漢)까지 유행했다. 중국에 현존하는 서주(西周) 청동호(青銅壺)가 쌍을 이루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가백호(賈伯壺)는 쌍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기형(器型)이 완전하고, 전체적인 선이 유창하고 아름다우며, 무늬 장식이 화려하여 현재 가장 잘 보존된 서주 말기 청동기 중 하나이다. 호 뚜껑에 새겨진 8행 33자는 ≪좌전(左傳)≫에 기록된 "가백(賈伯)"이 가국(賈國)의 임금임을 증명하며, 매우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3
제3전시장
문자일통(文字一統)
춘추전국시대에는 다양한 문자가 존재하여 제(齊), 연(燕), 진(晉), 초(楚), 진(秦)의 5대 문자 체계가 형성되었다. 진계문자(秦系文字)가 상주(商周) 문자의 특징을 비교적 많이 계승했지만, 다른 네 가지 체계의 문자는 모두 강한 지역적 특색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문자의 통일은 필수적이었다. 기원전 221년, 진시황(秦始皇)은 전국을 통일하고 중국 역사상 첫 대통일제국인 진나라(秦朝)를 세웠다. 그는 이사(李斯), 조고(趙高), 호무경(胡毋敬)등에게 문자를 정리하라고 명령하고, 간소화된 "소전(小篆)"을 표준 서체로 하여 전국에 통용시켰다.
종예도해(從隸到楷)
양한(兩漢) 400여 년 동안, 서체는 주전(籀篆)에서 예서(隸書)로, 예서에서 장초(章草), 해서(楷書), 행서(行書)로 바뀌었다. 한말(漢末)에 이르러 중국의 한자 서체는 이미 기본적으로 갖추어졌다. 한위(漢魏) 시기 한자 서체의 끊임없는 변화는 중국 한자 서예 예술의 번영을 위한 길을 열어주었다. 한나라는 간백(簡帛) 사용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의 간백 발견은 지역적으로 넓고 양적으로 방대하며, 내용이 풍부하고 서체가 다양하여 예서가 진나라의 예서로부터 독자적인 구조 규칙을 형성하고 성숙한 예서 풍격을 이루었음을 충분히 반영하는 동시에, 한자가 예서에서 해서로 발전하는 과정을 반영한다.
설자전의(說字傳義)
한자 연구는 허신(許慎)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허신은 동한(東漢)시대의 유명한 경학자(經學家)이자 문자학자로, 어릴 때부터 서예를 좋아했고 특히 소전(小篆)에 능했다. 글씨를 연습하는 동안 고대 한자에 큰 흥미를 느껴 이를 열심히 연구한 끝에 ≪설문해자(説文解字)≫를 집필하게 되었다. 이 책은 중국에서 고대 한자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해석하는 중요한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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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전시장
십문유채(拾文遺彩)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며 세계에서 문자 종류가 가장 풍부한 나라이다. 고대로부터 19세기 말까지 중국에는 근 40종의 소수민족 문자가 나타났다. 중국 소수민족 문자의 창제 시기, 사용 범위, 개량 및 발전 상황에 따라 대체로 고대 민족 문자, 전통 민족 문자, 신창(新創) 및 개량 민족 문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승고전금 (承古傳今)
고대 민족 문자는 중국 고대 역사에서 창조되었거나 외부에서 유입된 민족 문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문자들은 특정 시기에 사용되었으며, 역사상 다양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문자들을 사용했던 민족 집단들이 분화하고 융합되거나 언어가 교체되면서 이러한 문자들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점차 사라졌다.
창신발전(創新發展)
1950년대 이후 정부는 일부 소수민족 문자의 창제와 개량을 도왔다. 이들 소수민족 문자는 신창(新創)된 장문(壯文), 부이문(布依文), 강문(羌文) 등을 포함하여 총 17종이 있다. 해방 이후, 문자가 없는 민족에게 문자를 창제하도록 돕는다는 중앙 정부의 지시에 따라 언어학자와 장족(壯族)민족언어 전문가들이 대량의 연구 조사를 진행한 후 1957년에 장문은 국무원에서 정식 문자로 승인되었다.
5
제5전시장
인쇄술의 기원
인쇄술은 중국 고대의 4대 발명 중 하나로 조판 인쇄(雕版印刷)와 활자 인쇄(活字印刷)의 두 가지 발전 단계를 거쳤다. 인쇄술의 발명으로 책을 복제하는 방식이 필사에서 기계적 복제로 바뀌었고,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를 얻는 비용을 낮추었다. 이는 중국 문화의 발전과 전승, 세계 문화의 전파와 교류에 매우 깊은 영향을 끼쳤다.
조판인쇄(雕版印刷)
조판 인쇄는 문화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뚜렷한 단점도 존재했다. 첫째, 각판(刻版)은 시간과 재료가 많이 들었다. 둘째, 대량의 책판(書版)을 보관하기가 불편했다. 셋째, 오자가 있을 경우 수정이 어려웠다. 북송(北宋)의 필승(畢升)이 발명한 활자 인쇄술은 이러한 조판 인쇄의 단점을 개선하였다.
활자연변(活字演變)
1450년, 독일인 구텐베르크는 중국의 활자 기술을 바탕으로 납합금 활자를 발명했다. 19세기 초 납활자 조판 기술이 중국에 전래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인쇄업자들은 이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한자의 특징에 맞춰 다양한 서체의 납활자 자모(字模)를 설계하고 제작했다. 초기에는 새긴 활자 자모 서체가 거의 모두 송체(宋體)였는데, 이후에 해서체(楷體), 방송체(仿宋體), 흑체(黑體)가 속속 나타났다.
컴퓨터에 입력된 한자
키보드로 중국어를 쓰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꿈이었다. 1950년대 이래로 국내외 많은 학자들은 다년간의 연구와 실천을 거쳐 한자의 자형과 자음의 정보 특성을 이용하여 키보드로 한자를 입력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70년대 말, 중국은 잇따라 한자 정보 처리에 관한 일련의 국가 표준과 규범을 제정하여 한자코드를 규범화 방향으로 발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