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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골각사(甲骨刻辭)
갑골문은 상(商)과 서주(西周) 시대에 귀갑(龜甲), 수골(獸骨)에 새겨져 점복 내용을 기록하는 데 사용된 문자로, 현재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문자 체계이다. 그 중에서 은상(殷商)갑골문이 가장 대표적이다. 갑골각사(甲骨刻辭)는 주로 날카로운 도구로 새겨졌으며, 필획은 가늘고 단단하며 곡선보다 직선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선의 굵기와 상관없이 필획은 모두 힘이 넘치고 입체감이 있으며, 필획의 풍격은 시대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난다.
○ 전시된 귀갑(龜甲)
제사복사(祭祀卜辭)의 주요 내용은 경진(庚辰), 갑신(甲申), 을유(乙酉) 등 다양한 날에 양, 돼지, 술 등의 제물로 선비 비경(先妣妣庚), 선왕 조갑(先王祖甲), 조을(祖乙)에게 각각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갑골의 내용은 자(子)와 자직(子戠)이 춤을 배울 것인지에 대해 점을 친 것이다. 이 갑골은 무정(武丁) 시기의 소자조(小字組) 풍격으로 가늘고 세밀한 느낌이 있다.
○ 토방정도주복골각사(土方征塗朱卜骨刻辭)
"갑골의 왕"으로 불리는 ≪토방정도주복골각사(土方征塗朱卜骨刻辭)≫는 매우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갑골 조각은 현재 중국국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앞뒤 양면에 복사(卜辭)가 가득 새겨져 있다. 자형은 비교적 크고 글자의 홈에는 주홍색이 칠해져 있으며, 서풍(書風)은 웅혼하고 필획은 굵고 강건하여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蘭亭序)≫와 견줄 만하다. 갑골문 서예 학습자들에게는 최고의 "법첩(法帖)"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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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 명문(青銅銘文)
청동은 "금(金)"이라고도 불리며, 청동기에 새겨진 명문은 "금문(金文)"이라고도 한다. 갑골문에 비해 금문의 풍격은 단정하고 웅장하며 묘당(廟堂)의 기운이 가득하다. 청동 명문은 전국(戰國)시대 이전에는 주로 주명(鑄銘)이었으며, 전국시대에는 각명(刻銘)이 많아졌다.
○ 태사차궤(太師虘簋)
"태사(太師)" 는 관직의 명칭으로 경대부(卿大夫)급에 해당한다. "차(虘)" 는 사람 이름이다. 이 기물의 뚜껑에는 명문 7행 70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대략 정월 기망 갑오일(正月既望甲午日)에 왕이 태사 차(虘)를 궁으로 소환하여 호피로 만든 옷을 하사하였다는 것이다. 태사 차(虘)는 이 일이 매우 영광스럽게 여겨 기록으로 남겼다. 상주(商周)시대에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기가 만여 개 있지만 이처럼 연월일까지 고스란히 기록된 것은 30여 개에 불과하다. 명문의 자형은 갑골각사에 비해 더욱 정연하고 결체(結體)가 더욱 엄밀하며 배치도 더욱 균형적이다.
○ 중산왕방호(中山王方壺)
전국(戰國) 후기에는 청동기 각명(刻銘)이 점점 많아졌으며, 1977년에 허베이성(河北省) 평산(平山)의 전국중산왕묘(戰國中山王墓)에서 출토된 ≪중산왕방호(中山王方壺)≫는 매우 대표적인 기물이다. 이 호는 현재 허베이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기물 외벽에는 장편 명문이 새겨져 있다. 각 면마다 10행씩 총 450자의 명문이 있다. 중산왕 14년에 중산이 연나라(燕)를 정벌하여 승리를 거둔 후 이 호를 주조했으며, 중산의 상방(中山相邦)이 연나라를 정벌한 공적을 찬양하고 정권을 공고히 하는 중요성과 나라를 안정시키는 도리를 설명했다. 명문 새김 기술은 정교하며, 가로획은 짧고 힘차며 세로획은 길고 곡선이 많다. 이는 전국 말기 의 금문(金文) 진품(珍品)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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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각서예(石刻書法)
"석(石)으로 금을 대신하면 영원히 보존할 수 있다." 조상들은 문자를 금, 석에 새겼는데, 최초의 목적은 모두 문자에 담긴 내용이 오랫동안 보존되어 전해지기 위해서였다. 석재는 재질이 견고하고, 뚫기가 편리하며, 폭이 넓고, 새기기 쉽고, 위치가 유연하며, 보존하기 편리하다는 등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점차 청동 명문의 역사적 지위를 대체하였다.
○ 석고문(石鼓文)
석각 문자는 상나라의 석경(石磬)과 옥기(玉器)에 가장 먼저 보인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석고문(石鼓文)≫을 대표로 하는 소량의 각석작품의 편폭이 크게 증가했다. 석고문은 석각의 시조로 불리며, 열 개의 북 모양 화강암 석단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석고문"이라고 불린다. 각 석고(石鼓)에는 사언시(四言詩) 한 편이 새겨져 있으며, 진공(秦公)의 유렵 내용을 기술하였다. 이는 대전(大篆)에서 소전(小篆)으로 변화하는 비정형의 과도적 서체이다. 이러한 석고문은 주진(周秦) 역사, 금석학(金石學), 문자학, 문학사와 서예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등자사비(等慈寺碑)
≪등자사비≫의 전칭은 ≪대당황제등자사지비(大唐皇帝等慈寺之碑)≫로 당대 안사고(顔師古)가 작성한 것으로 전해지며, 지금으로부터 이미 13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비문은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이 수천 명의 정병만으로 두건덕(竇建德)의 십만 대군을 대파한 호로관 전투(虎牢之戰)와 사찰을 짓고 비를 세운 이유를 기록한 것으로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비문의 배치와 장법(章法)은 행렬이 분명하고 넓고 청명하다. 당대 저명한 서예가인 구양중석(歐陽中石)은 이 비를 학습한 후 위비(魏碑)나 성숙한 당해(唐楷)를 배우는 것이 매우 편리할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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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독문서(簡牘文書)
종이가 나타나기 전에 중국 문자 기록의 주요 매체는 간독이었다. 대나무로 만든 것을 간(簡), 나무로 만든 것을 독(牘)이라 했으며, 또는 좁은 것은 간, 넓은 것은 독이라 했다. 간독의 내용은 주로 문서와 전적(典籍)으로, 필체는 뚜렷하고 먹의 색감이 느껴졌다. 서체는 고문(古文)에서 행초(行草)까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했다. 진간(秦簡)은 소박하고 초간(楚簡)은 낭만적이며 한간(漢簡)은 웅장했다. 시대마다 서로 다른 서풍(書風)이 나타나 현란하고 다채로우며 중국 서예사(書法史)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 상박간(上博簡)
1994년, 상하이박물관은 홍콩 골동품시장에서 전국시대의 초간(楚簡) 1600여 개를 두 차례에 걸쳐 구입했다. 내용은 철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를 포함하고 있으며, 특히 공자(孔子)의 사상에 관한 기록은 선진유가(先秦儒家)의 중요한 일문(佚文)이다. 전시된 판에서 보듯이, 가로획들은 대부분 오른쪽 위로 기울어져 있고, 세로획은 끝이 뾰족하게 마무리되며 작은 점이 붙어 있다. 일부는 장식용이며, 일부는 짧은 가로획을 대체하는 필법이다.
○ 칭화간(清華簡)
칭화대학교는 2008년 7월 전국시대의 죽간(竹簡) 약 2500개를 소장하게 되었다. 이 죽간들은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문자 대부분은 초계풍격(楚系風格)이다. 이 죽간들은 진나라 이전에 지하에 묻혔기 때문에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영향을 받지 않아 선진(先秦) 고서의 상태를 최대한 보여줄 수 있다. 이를 연구하는 것은 중화문화의 초기 모습과 발전 맥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림 속의 이 두 개는 ≪초거(楚居)≫편으로, 초나라 사관이 작성한 것이다. 약 2300년 전 초조(楚祖)부터 초숙왕(楚肅王)까지의 역대 이주 경로와 초나라 국명의 기원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초나라 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이 편의 필적이 정연하고 문자 구조가 긴밀하며 운필이 유창하고 필획 간의 호응이 볼 수 있어 생동감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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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문백서(縑文帛書)
대나무와 나무로 만든 간독은 얻기 쉽지만 너무 무거웠기 때문에, 같은 시기에 가볍고 부드러우며 휴대하기 편리한 겸백(縑帛)이라는 재료도 사용되었다. 견백(絹帛)에 글씨를 쓰는 것을 백서(帛書)라고 한다. 백서는 춘추시대에서 시작되어 양한(兩漢)시대에 성행했으며, 간독과 종이 등 다른 서사(書寫) 매체와 공존했다.
○ 압두환첩(鴨頭丸帖)
이 작품은 왕헌지(王獻之)의 행초 대표작이자 유일하게 전해지는 견본(絹本) 진적이다. 내용은 그가 친구에게 보낸 짧은 편지로 오늘날 우리가 친구에게 보낸 짧은 메시지처럼 15자로 구성되어 있다. 글의 내용은 "압두환(鴨頭丸), 역시 좋지 않네. 내일 반드시 모여서 그대와 만나겠다."이다. 이 글의 어투를 보면, 누군가가 이미 압두환을 복용했지만 효과가 좋지 않았다는 사실을 왕헌지에게 알려주었고, 왕헌지는 복용 후 그 말을 확인했다. 그래서 그는 이 친구에게 내일 만나자고 약속했으며 조언을 구하려 한 것이다. 명말청초(明末清初)의 감정가 오기정(吳其貞)은 이 첩에 대해 "서법이 아담하고 웅장하고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천연의 묘미를 지닌 무상의 신품이다."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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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서한묵(紙書翰墨)
겸백(縑帛)에 글씨를 쓰는 것은 비용이 많이 들었다. 한나라(漢代)에 종이가 발명되면서 글씨를 쓰기에 더 편리한 재료가 생겼다. 서사(書寫)재료의 발전은 글씨의 양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공식 문서, 개인 서찰, 문인의 원고, 고당 대축(高堂大軸) 등 한자 글씨의 내용이 더욱 풍부해지고 형식도 더욱 다양해졌다.
○ 난정서(蘭亭序)
왕희지(王羲之)의 ≪난정서≫는 "천하제일행서"라고 불린다. 아쉽게도 원본은 찾을 수 없으며. 그림에 전시된 ≪난정서≫ 묵본(墨本)은 당나라의 풍승소(馮承素)가 황제의 명을 받아 난정의 진적에 쌍구(雙鈎)법으로 모사한 것이다. 원물은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진목제(晉穆帝) 영화 9년 음력 3월 3일 상사절(上巳節)에 습속에 따라 물가에서 제사를 지내고 액운을 쫓는 행사를 기록했다. 명성을 떨친 사안(謝安) 등 문인과 선비, 그리고 왕희지와 그의 아들 등 41명이 난정에 모여 곡수유상(曲水流觴), 시를 지으며 감회를 읊었다. 총 37편의 시가 작성되어 책으로 모아졌고, 모두가 만장일치로 왕희지가 서문을 쓰도록 추천하여 이 불후의 명작 ≪난정서≫가 탄생했다. 왕희지는 이 글을 썼을 때 이미 51세였고 서예풍격은 가경에 이르렀다. ≪난정서≫는 그의 서풍이 성숙된 시기의 대표작품이다. 전편의 용필(用筆)은 신의 도움을 받은 듯하며 유려하고 자유분방한 기운이 가득하고, 20개의"之(지)"자는 각기 다른 형태로 변화를 이루었다. 후세 사람들은 조식(曹植)의 ≪낙신부(洛神賦)≫라는 글에서 "놀라서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나풀거리고, 유유히 헤엄치는 교룡처럼 나긋나긋하다"는 구절로 왕희지 서예의 아름다움을 극찬하였다.